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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유산/환우이야기.보호자 가이드

한강까지, 그리고 서울을 걷다

by Salndehuman의 The humanstory 2026.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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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절반은 당신의 외조였습니다."


안양천까지 걷게 되었을 무렵,

나는 조금씩 살아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걸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데리고 걸어준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나는

사람 구실조차 하기 힘들었습니다.


손은 떨렸고,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허리는 점점 앞으로 굽어갔습니다.


옷 단추 하나 채우는 일도

전쟁이었습니다.


신발 끈을 묶는 일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버거웠습니다.


머리를 감는 일조차

누군가의 손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편이었습니다.


그는 내 병을 대신 앓아줄 수는 없었지만,

내 아픔을 혼자 지게 두지는 않았습니다.


아침이면

떨리는 손 대신 단추를 채워주었습니다.


굳어가는 손가락 대신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머리를 감겨주고,

등을 밀어주고,

비틀거리는 걸음을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는 나보다 먼저 걷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내 걸음에 맞추어 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아니,

사랑이라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대신 떠받치고 있던

조용한 헌신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안양천을 걸었습니다.


어느 날은

한강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서울의 궁궐들을 걸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여행을 다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해 걷고 있었습니다.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내가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경복궁을 걸을 때면

그는 옛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이성계 이야기.


정도전 이야기.


무학대사 이야기.


나는 숨을 헐떡이며 걷고 있었지만,

그는 마치 현장에 있었던 사람처럼

그 시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신기하게도 병을 잊곤 했습니다.


통증도 잠시 잊었습니다.


두려움도 잠시 잊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역사를 들으며 하루를 견뎠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내가 들었던 것은 역사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리 조금만 더 걸어보자."


"괜찮아."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결국 그 한마디였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내게 기적은

하늘이 갈라지거나,

병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넘어질 것 같은 나를 붙잡아 주던 손.


비틀거리는 나를 기다려주던 발걸음.


절망 속에서도

오늘 하루만 더 살아보자고 말해주던 눈빛.


그것이 기적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서울의 궁궐 사진을 보면

궁궐이 먼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강 사진을 봐도

강물이 먼저 떠오르지 않습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 옆에서 천천히 걸어주던

한 사람의 뒷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압니다.


내가 살아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낸 시간이었다는 것을.


내 영혼의 절반은

그 사람의 사랑으로 다시 숨을 쉬게 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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